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식지 Vol. 10(2024. 12.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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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논평]
역사의 기억과 청산이 만들어내는 기적
- 집회의 흥겨움은 "깊은 슬픔"의 절박한 몸부림이다.
한혜인(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비현실적 현실
2024년 12월 3일, 10시 23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왔던 윤석열의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는 비현실적이었다. 11시 27분 발표된 제1호 포고령은 “처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자유대한민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 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23:00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합니다.
-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 뉴스, 여론조작, 허위 선동을 금한다.
-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 행위를 금한다.
-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 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 시에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 반국가세력 등 체제 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9조(계엄사령관 특별 조치권)에 의하여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국회로 몰려갔다. 시민들은 경찰과 대치하고 계엄군과 대치하면서 길을 열었고, 국회의원들은 속속 국회 안으로 들어갔다. 시민들은 카메라를 들고, 계엄군들에게 “막지마, 하지마!”를 외쳤고, 경찰과 계엄군들도 총부리를 시민들에게 대지 않았다.
소위 아들을 둔 아버지는 목메이는 목소리를 억누르면서, “네 목숨 지키는게 제일 중요하고, 두 번째는 민간인을 공격하거나 살상하는 행위를 절대 하면 안돼 알았어?”라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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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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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는 카메라를 국회 앞에서 들어가는 국회의원들을 세어 11시 45분 경, 150명을 넘은 것 같다는 긴박한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12시 49분 국회 본회의 개의하고 12월 4일 새벽 1시 1분에 재석 190인 중, 찬성 190명으로 “비상계엄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그리고 4시 27분에 윤석열의 선포해제, 계엄사령부 해체를 발표하고, 4시 30분에 국무회의를 열어, 계엄해제안을 의결 발표했다. 그리고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죄송합니다”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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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죄송합니다” 시민에 허리 숙여 사과하고 떠난 계엄군, 동아닷컴 2024-12-04 1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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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겨움은 역사의 기억이 주는 절박한 몸부림
이 6시간은 지옥이면서 희망이었다. 윤석열과 계엄군, 경찰 수뇌부, 그리고 여당 국민의 힘은 은밀한 연대로 어둠을 만들려고 했지만, 시민들의 연대는 신속함과 흥겨움으로 희망을 만들어 냈다. 윤석열이 만들어놓은 퇴행을 바로잡기 위해 누가 모으지도 않았지만, 여의도를 가득 채울 정도로 모여들었다.
집회는 2017년 박근혜 탄핵시기의 집회와도 조금 다른 성격이었다. 촛불 대신 응원봉이 나왔고, 민중가요 뿐 아니라, K-POP이 흘러나왔고, 그 음악에 “윤석열 탄핵”이 후렴구를 붙였다. 그러나 이런 흥겨움은 결코 가벼운 오락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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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외신 “K팝 콘서트장 같은 탄핵집회…민주주의 위해 온 세대 함께해”, 영·미·독 주요 언론, 한국인 4분의 3이 윤석열 탄핵 지지 등 보도. 장예지기자 수정 2024-12-15 09: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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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에서 보여주는 그 흥겨움, 그 깊은 곳에는 역사적 경험에서 오는 본능적 ‘공포’와 절박함이라고 생각한다. 1949년 2월 5일의 여수·순천 사건, 1948년 11월 17일 제주 4·3 사건, 1961년 5.16 구테타, 1964년 6.3항쟁, 1972년 10월 27일 부마민주항쟁, 1979년 10·26 사태, 1980년 5월 광주 등에서 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제의 친구가 나를‘빨갱이’로 몰아, 죽이기도 하고, 혹은 내가 이웃에 총구를 겨누기도 했던, 공동체 안에서의 그 깊은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공동체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없다는 그 공포는, 이전에는 권력자 앞에서 무너지거나 목숨을 거는 저항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집회장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거움과 흥겨움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비극과 우리 현대사회가 만들어간 공통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하나의 숨겨진 사건으로 치부하지 않고, 기억하고, 증명하고, 책임지우는 '역사'로 만들어 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해방이후 현재까지 끊임없이 과거사 청산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과거사 청산이 매번 만족할 만큼 완성되지 못해 안타까워했지만, 사실 그 노력의 과정 속에서 ‘인권, 역사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공유되었다고 확신한다. 이번 내란에 개입된 사람들 중, 소극적 대응을 하거나 양심고백을 하는 지휘관들에게도 존재했다고 본다. 우리 공동체가 겪었던 역사의 무게와 그것을 청산해 온 과정 속에서 자신의 행위가 역사적으로 어떠한 처벌을 받게 되는지에 대하여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사건 앞에서 '주저"하는 시간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과거사 청산의 과정 속에서 생긴 공동체의 믿음이 비상계엄 속의 “처단”이라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시민들 앞에서의‘주저’와 시민들의‘흥겨움’으로 승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024년 12월 3일부터 12월 14일까지, 우리는 같은 공동체 안에서 생겼던 이 역사적 상처가 주는“깊은 공포와 슬픔”을 연대의 흥겨움으로 공유했다. 이와 같은 시민들의 연대와 흥겨움의 뿌리는 그것은 우리가 겪어온 사건을 역사화하고 기억하고 청산하려는 노력이고, 그것이 비록 우리가 원하는대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 속에서 만들어낸 가치가 우리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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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포럼 공동선언]
동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위하여
- 제22회 역사 인식과 동아시아 평화 포럼 공동 선언 -
수천 년의 문명 역사를 겪어오는 동안, 인류는 평화 추구라는 아름다운 미래상을 그려왔지만, 오늘날 우리가 평화로이 논의를 진행하는 이 순간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으며, 심지어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기도 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의 전쟁은 2년 8개월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의 전쟁 역시 약 1년이나 지속되어 왔음에도, 휴전의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의 고통을 받는 국가의 국민들은 집과 가족을 잃는, 가족과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을 매일 같이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우리는 과연 무관심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는 없습니다.
2024년 9월 17일자 미국《월스트리트 저널》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의 전쟁으로 100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약 48만명의 우크라이나 군인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고, 러시아 군인 사상자수도 6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숫자의 정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의 전쟁이 초래한 막대한 인명 피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 전쟁의 주 전장은 우크라이나이며, 그로 인해 나타난 인도주의적 위기는 참담한 상황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난민 생활을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640만 명에 달하며, 우크라이나 국내에서 난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의 수는 370만 명, 즉 우크라이나 국민 4명 중 1명이 고향을 떠나 피신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난민들은 세계 곳곳에서 방황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국가와 이들 난민들을 받아주는 국가의 부담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2024년 10월 8일자 아랍반도 TV 보도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인해 가자 지구 거주 중인 팔레스타인 최소 41,909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가자 주민 55명 중 1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최소 16,756명의 아동이 희생되었고, 17,000명이 넘는 아동이 부모를 잃었습니다. 가자 지역의 장애인 인구는 약 97,303명으로, 이는 23명 중 1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차가운' 숫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담고 있으며,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동아시아 내부에서는 비록 일본 정부가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지 않지만, 한중일 3국의 학술계 및 시민 사회는 이미 소통과 교류의 장을 열었습니다. 특히 3국의 학자들은 동아시아 역사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하며, 공통된 인식을 찾고, 이견은 잠시 보류하는 방식으로 공통의 역사 부교재를 집필한 바 있습니다. 한편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온 동아시아 평화 포럼도 제22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3국 학생들은 동아시아청소년역사체험 캠프를 통해 상호간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었습니다. 비록 역사인식 상의 차이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3국 학술계와 일반 시민 간의 소통 확대는 역사인식 문제의 화해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한중일 3국은 지리적으로도 인접하며, 역사와 문화적으로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또 세계 평화와 발전은 인류의 영원한 주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3국 정부가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지만, 역사인식 문제는 여전히 큰 장애물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과거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면 동아시아 공동체를 세운다는 것은 허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한중일의 민중들은 증오의 상태가 지속되길 원하지 않으며, 진정한 평화의 상태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항일 전쟁 과정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던 도시 창사에 모여 고통과 아픔으로 가득했던 역사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침략 역사에 대한 왜곡과 변형에 반대하고, 극우 정치 세력의 영향력이 다시 커지는 것과 군국주의에 대한 집착을 절대 반대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이는 평화, 협력, 공동 번영을 기초로 한 더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을 공동으로 선언합니다.
- 전쟁 반대 및 식민주의와 패권주의 청산을 위해, 국제적인 공동 행동이 필요합니다.
- 세계 평화 실현을 위해, 세계 모든 국가가 유럽과 중동 전선에 무기와 인적 지원을 중단하고, 전쟁 중지를 위한 즉각적인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 구축을 위해, 한중일 시민들은 공동 행동을 통해 정부 간 교류와 협력을 촉진시켜야 합니다.
2024년 11월 3일
제22회 역사인식과 동아시아평화포럼 참석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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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포럼 참관기]
동아시아 역사 기행 수업을 위해 동아시아 평화 기행을 다녀오다
박상언
2016년 3월 1일 꿈에 그리던 역사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규 발령을 받고 동교과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동아시아사 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장으로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교과목이기에 많은 선생님들이 부담을 느꼈던 과목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지만 처음 시작할 때 도전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리고 동양사라는 과목을 좋아했기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동양사를 좋아했던 저였고 임용고시를 공부했던 고시생 물이 빠지기 전이었기에 수업은 내용 지식 위주로 흘러갔습니다. 중국사, 일본사, 베트남사에 대해 깊은 이해를 요구하는 수업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파편화된 지식을 학생들이 쌓아갔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수능 기출 문제들도 점점 지엽적인 내용 지식이나 연표 문제들로 학생들을 변별하고자 했었기에 제 수업의 방향은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첫 학교에서 4년간 진행했던 동아시아사 수업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동아시아사 수업의 목표인 ‘동아시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통합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 이해를 도모하고 상호 발전과 평화를 추구하는 자세를 기름으로써 상호 협력의 전통을 더욱 강화한다. 나아가 동아시아 세계의 지속적인 발전과 항구적인 평화 정착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에 적절한 수업이었는지 계속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과서 내용을 다시 살펴보며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교육과정 재구성을 위해 공부를 해나갈수록 동양사와는 다른 동아시아사만의 고유한 학습 목표에 충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동아시아사는 동양사가 아니었습니다.
교육과정 재구성을 통해 동아시아사는 역연대기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학기 초인 3월달에 학습 동기가 불타오르는 학생들의 특성상 동아시아사 수업의 포커스를 근현대사로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고 인권 의식을 향상시키기 위한 민주시민교육으로서의 수업의 지향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라는 시대적 분위기 아래에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중심으로 왜 동아시아는 아직도 냉전 시대의 산물 속에서 새로운 냉전을 맞이하고 있는지 학생들이 인식할 수 있게 수업을 구성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큰 전쟁이 제노사이드와 같은 민간인 학살을 동반하였음을 강조하며 역사 글쓰기 수행평가를 진행하고 냉전 시기에 안정을 찾아갔던 유럽과 다르게 동아시아의 주변부는 폭력으로 물들었음을 제시했습니다.
학생들은 수업을 통해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평화가 ‘전쟁의 잠시 멈춤’인지 고민하게 되었고 평화가 지속되는 것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조금 더 국제적인 시야로 바라보고자 했고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도 더욱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기에 역사교육과 또는 사학과를 희망하는 학생들보다 신청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외교학과, 국제관계학과 등으로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훨씬 더 많이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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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험을 제22회를 맞는 역사인식과 동아시아 평화 포럼에 참석하여 공유하게 된 것이 무척 영광스럽고 뜻깊었으며 즐거웠습니다. 발표문을 작성하면서 제 수업의 방향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었고 ‘평화와 공존, 번영을 위한 동아시아 역사 읽기’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한 학생들이 지금 수업시간에 배우고 있는 역사를 박물관에 있는 유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삶과 연결지어 들여다보기를 원했기에 ‘지금 꺼내서 만나 보는 역사 수업’이라는 부제를 정했습니다.
수업 사례를 발표하는 것이지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을 주제로 창의적 체험활동을 진행했던 것도 함께 나누며 학생들이 수요 집회에 참여하고 전문가 초청 특강을 수강하며 보다 더 실천적으로 심도 있게 탐구했던 경험을 이야기 했습니다. 나아가 지역 교육청에서 주관했던 온라인 공동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진행한 수업인 ‘인문학적 감성과 역사 이해’라는 수업을 소개하며 공감과 이해를 일깨우는 역사 수업의 방향도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발표를 진행하면서 제가 생각하는 동아시아사 수업의 목표가 조금씩 분명해졌고 이는 다른 패널분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구체화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방문한 중국의 모습을 느끼며 제가 어렴풋이 저의 경험으로만 나눴던 담론들을 학문적인 언어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발표 후에 방지원 교수님을 비롯하여 한국의 여러 선생님분들, 일본에서 오신 선생분들과 제가 발표했던 내용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목표 의식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특히 윤세병 교수님과 함께 나눈 일본의 스즈키 선생님과의 대화가 저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제가 발표한 내용들이 실제 수업 현장에서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용들인가에서 출발하여 주제사로 엮어진 ‘동아시아 역사 기행’이라는 과목이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 주제사 구성된 교과에 대한 역사 교사들의 반응은 어떤지 등등 한국 교육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날카로운 질문들을 받아서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답변을 하는 과정에서 현시점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역사교육의 방향성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현장의 요구를 반영해서 통사가 아닌 주제사 중심의 역사 교육 과목이 만들어졌다고 말씀을 나눴을 때 ‘학생들은 시험을 봐야할텐데 반발하지 않는가?’ 라고 놀라워 하셨습니다. 학생부종합전형과 사회문제탐구 등 진로선택과목의 예시를 설명하며 수능이라는 5지선다형의 시험으로만 입시가 이루어지지 않기에 교과와 연계된 심화된 탐구를 학생들도 원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근무하는 곳이 광주‧전남이기에 가능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 대학교 입시에 도움이 된다면 어디든 좋아하시는 것 같다고 대답을 드리니 확실하게 공감하시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러한 대화 속에서 한국 교육에 대한 이해가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교육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탐구해 볼 필요성이 크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한 교육을 통해 시민들의 의식이 성장하고 그 인식의 토대 위에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건강한 시민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역사 교육이 중요함을 마음 속에 새겨놓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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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식과 동아시아 평화포럼 기간 동안 한중일 다른 패널분들의 발표와 토론 내용들은 굳어져 있었던 저의 관점을 확장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특히 100년 전쟁과 연결지어 70년이 넘게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을 발표하셨던 이태호 소장님의 말씀은 학생들에게 어떻게 통일 교육을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저에게 던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00년 전쟁도 100년 동안 싸운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동아시아사 수업에서 진행했던 것과 연결지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학생들과 고민해보는 관점에서 통일에 대해 바라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귀국하는 주말에 학생들과 DMZ 평화캠프를 가게 된 상황에서 더 의미가 있었습니다. 반공 교육만으로 통일 교육을 마무리 하면 안된다는 이신철 소장님의 조언도 참고하면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한반도의 안정과 통일이 왜 중요한지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지원 교수님과 조철수 선생님의 발표문을 함께 눈으로 읽어나가면서 전쟁과 폭력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던 교과서 서술 대신에 반전과 평화의 관점으로 교과서를 새로고침 해보는 것이 학생들의 역사 인식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해부터 계획해 보았지만 수능이라는 현실과 타협을 하며 힘을 크게 쏟지 못했던 ‘동아시아사 평화와 인권으로 새로고침’이라는 활동지를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김정인 교수님의 동아시아 역사 기행에 대한 발표를 들으면서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특히 기존의 동아시아사와 다르게 현재 개편된 ‘동아시아 역사 기행’ 과목은 오늘날 동아시아의 현실을 고려한 현재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역사적 주체로서 참여하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교육 목표 중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평화 포럼에서 우리가 함께 나눈 담론들이 앞으로 동아시아사를 학습하는 학생들이 바라봐야할 지향점이자 목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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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국은 한번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설레었고 궁금했습니다. 비자 받기도 어려웠습니다. 빠른 시간에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행사를 통해 진행하니 10만원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밤늦게 도착한 후 새벽에 비자가 자유로워졌다는 말을 듣고 실소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가보니까 놀라웠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중국은 훨씬 발전한 것 같았습니다. 도로에는 전기차와 전기 스쿠터가 대부분이었기에 소음도 매연도 많이 없었습니다. 창사라는 도시는 엄청 컸습니다. 서울이나 홍콩에서 봤던 대도시의 모습과 그 규모는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중국분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생각보다 미국의 세계 정책을 바라보는 중국의 인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토론문을 통해 질문하신 한혜인 교수님의 말씀처럼 동아시아의 안보 문제 상황에서 그러한 중국의 생각과 역사정책이 보편적 인권과 평화주의가 중심이 되고 있는지, 동아시아를 과연 평화로 이끌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또한 일본 패널 분들의 발표를 통해 일본 내에서도 ‘일본의 적극적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국가주의적 관점을 넘어 보편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자국사를 직면하여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그 방안을 함께 모색해보고 싶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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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역사인식과 동아시아 평화포럼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담론들이 오고 가며 인식을 공유하는 과정들은 서로의 입장과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알면 미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오히려 더 나은 방향을 위해 함께 고민해보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한종 교수님의 인사 말씀의 내용 처럼 다른 한편으로 이런 노력이 여전히 갈길이 멀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전히 자국사 중심의 역사 서술과 역사 인식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워보였습니다. 이는 동아시아 각국이 처해 있는 안보 상황과 외교 관계라는 크나큰 현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모색하는 길은 힘들어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결과만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전쟁의 현실과 역사 기억 속에서 평화를 찾는다’라는 올해의 평화포럼 주제처럼 동아시아 3국은 평화를 찾아나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함께 해야할 것입니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더불어 다시 국제적인 긴장 관계가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더욱 이러한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걸어나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인식의 공유를 통한 평화 포럼이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동아시아 3국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는 촉매제가 되어 한중일이 굳건히 연대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소망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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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대화]
한일화해와평화플랫폼, 이시바 총리에게 공개요청서 보내다
지난 11월 14~16일, 일본 도쿄 국립올림픽기념청소년센터에서는 한일화해와평화플랫폼의 공동운영위원회가 열렸습니다. 올해의 공동운영위원회는 "한일시민사회의 연대로 평화로운 동아시아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한일조약 60년, 한국 광복.일본 패전 80년을 향해'라는 대주제로 이루어졌습니다.
2025년은 한일기본조약 체결 60주년이 되는 해이면서 또한 한반도의 해방과 분단, 그리고 일본의 패전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미국의 압력 하에 역사 인식 문제, 전후 보상 등 인권 문제를 뒤로 미루고 정치적 타협을 시도하여 생겨난 '65년 체제'는 현재 한국과 일본, 북한과 일본, 그리고 일본 내 재일교포 문제, 나아가 동아시아에서 진행되는 '신냉전' 문제의 기원이 되고 있습니다. 한일화해와평화플랫폼은 이 '65년 체제'를 끝내기 위한 노력을 추진해야 한다는 인식을 분명히 하면서,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2025년 행동계획'을 논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마지막 날인 16일에는 공동 결의문인 '이시바 시게루 총리에게 보내는 공개요청서'를 작성하여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기자회견에는 김경민(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이태호(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 한반도평화행동 공동집행위원장), 손미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다카다 켄(高田健 용서하지 마라! 헌법개정시민연락회), 광연이치로(光延一郎 일본가톨릭 정의와 평화협의회), 오노 문도(小野文珖 종교인 구조의 화), 와타나베 켄키(渡辺健樹 한일민중연대 전국네트워크), 김성제(金性済 한일화해와 평화플랫폼 서기), 사토 노부유키(佐藤信行 외국인주민기본법 제정을 요구하는 가나가와기독교연락회) 등 9명이 참석했습니다.
우리 단체에서는 이신철 공동운영위원장이 참가하여 둘째날인 17일 <일본 역사 책임의 현재> 섹션의 세번째 발표 '역사교육 문제'에 대하여 발표하였습니다.
공개요청서 한국어 전문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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